쿠레주 새 수장이 공상과학 유산에 장난을 걸다
드류 헨리, 쿠레주의 우주를 다시 쓰다
9월 30일 파리, 쿠레주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드류 헨리가 2027년 봄여름(SS27) 컬렉션으로 첫 데뷔 무대를 치렀다. 니콜라 디 펠리스가 5년간 쌓아온 정밀하고 날카로운 모노크롬 노선을 뒤로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헨리가 브랜드의 방향키를 새로 쥐었다. 올 시즌 파리 패션위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교체 이후 첫 컬렉션을 선보인 하우스는 쿠레주와 카르벵, 단 두 곳뿐이다. 최근 몇 시즌 메이저 하우스마다 디렉터가 줄줄이 바뀌던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줄어든 숫자이며, 그만큼 이번 시즌 업계의 시선은 유독 이 두 데뷔에 쏠렸다. 1961년 앙드레와 콕클린 쿠레주 부부가 파리에서 설립한 이 하우스는 우주시대 실루엣과 고글, 플랫폼 고고부츠로 대표되는 유산을 지녔고, 그 유산을 다음 세대 디자이너가 어떻게 다루느냐는 언제나 패션계 전체가 지켜보는 질문이었다. 헨리는 셀린(피비 파일로 시절)과 JW 앤더슨, 피비 파일로 자신의 브랜드, 버버리를 차례로 거치며 줄곧 수석급 디자이너로 일해온 인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함을 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교체 자체가 뉴스였던 최근 몇 시즌을 지나 이제는 '누가 바뀌었나'보다 '그 결과 무엇이 달라졌나'를 들여다볼 여유가 생긴 시점에서, 그의 첫 무대는 더 꼼꼼히 해부할 가치가 있었다. 헨리의 합류 자체는 지난 3월 발표돼 5월부터 업무를 시작했으니, 반년 남짓한 준비 기간을 거쳐 이번 무대에 오른 셈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헨리가 선보인 첫 번째 룩은 백지 같은 올화이트 조끼였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위쪽 세 개 버튼만 채우고 허리와 다리 쪽은 느슨하게 풀어둔 디자인으로, 쿠레주의 간결한 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여백을 남기는 방식으로 시즌의 문을 열었다. 이후 무대는 블록 컬러와 장난스러운 디테일로 전환됐다. 폭신한 퍼 스틸레토, 쿠레주 아카이브에서 그대로 꺼내온 기상천외한 모자가 등장하며 브랜드 특유의 공상과학적 유머가 다시 살아났다. 1960년대 쿠레주를 상징하던 고글과 플랫폼 부츠, 입체적인 실루엣은 이번 컬렉션에서도 뼈대로 남았지만, 디 펠리스가 강조했던 절제되고 긴박한 분위기 대신 보다 가볍고 사이키델릭한 쪽으로 무게를 옮겼다. 같은 우주시대 코드를 두고도 전임자는 그것을 날카롭게 벼려냈고 후임자는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는 점에서, 이번 데뷔는 소재를 바꾼 것이 아니라 소재를 다루는 태도를 바꾼 사례로 읽힌다. 아카이브에서 모자를 그대로 꺼내 쓴 선택 역시 상징적이다. 새 디렉터가 과거를 지우는 대신 창고에서 다시 꺼내 현재의 조명 아래 세운 것이기 때문에, 이 데뷔는 단절이 아니라 재해석으로 분류하는 쪽이 더 정확하다.
왜 지금인가
이번 컬렉션을 설명할 때 자주 불려나온 비유가 해크니, 스토크 뉴잉턴, 마레 같은 동네의 컨셉스토어다. 먹을 수 있을 것처럼 생긴 비누, 터무니없이 비싼 흔들리는 캔들, 들어본 적 없는 인테리어 잡지, 색깔별로 정갈하게 진열된 미니멀 럭셔리 의류를 파는 공간들. 그런 가게에서 몇 시간을 보내며 마차를 마시고 신상 향수를 시향하는 젊고 여유 있는 취향층이 지금 쿠레주 SS27이 말을 거는 대상이다. 디 펠리스 체제의 쿠레주가 날렵하고 금욕적인 모노크롬으로 그 취향층의 한쪽 극단을 대변했다면, 헨리는 같은 취향권 안에서 장난기와 색을 허용하는 쪽으로 좌표를 옮긴 셈이다. 이 변화가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타이밍이다. 최근 몇 시즌 파리는 거의 매 시즌 주요 하우스의 디렉터 교체로 들썩였고, 그 피로감 속에서 이번 시즌 데뷔가 쿠레주와 카르벵 둘뿐이라는 사실 자체가 업계에 숨 고르기 신호로 읽혔다. 핀토 가문의 투자사 아르테미스가 2018년 인수해 케링과 같은 지붕 아래 둔 쿠레주로서는, 적은 수의 데뷔가 쏠리는 주목을 고스란히 흡수할 기회이기도 했다. 미니멀과 장난기 사이, 지금 럭셔리 소비자의 취향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로 이 데뷔를 보는 시선도 있다.
다음에 볼 것
같은 날 오후 카르벵에서는 카이 네셀라트가 자신의 데뷔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번 시즌 단 두 건뿐인 하우스 데뷔가 하루 사이로 이어진 만큼, 두 컬렉션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작업은 이번 파리 패션위크를 정리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지점이 될 것이다. 쿠레주 쪽에서 이어서 지켜볼 것은 헨리가 이번 시즌에 꺼내든 아카이브 모자나 퍼 스틸레토 같은 장난스러운 디테일이 다음 시즌에도 반복되는 문법으로 자리잡을지, 아니면 데뷔 무대에 한정된 제스처로 끝날지다. SS27은 명칭 그대로 2027년 봄여름 매장에 풀릴 물량이라 실제 소비자가 가격표를 마주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고, 그 사이 브랜드가 올화이트 조끼처럼 조용한 룩과 블록 컬러의 화려한 룩 사이에서 어떤 쪽에 캠페인과 홍보를 더 싣는지도 방향을 읽는 단서가 된다. 헨리가 셀린과 버버리에서 다져온 상업적 감각을 쿠레주의 작은 규모에 어떻게 이식하느냐, 그리고 아르테미스가 이 체제 전환에 얼마나 긴 호흡을 허락하느냐 역시 뒤따라 확인할 지점이다. 디 펠리스가 5년을 쓴 끝에 브랜드를 다음 단계로 넘겼듯, 헨리의 쿠레주도 이번 한 시즌의 인상만으로 평가하기보다 앞으로 두세 시즌의 궤적을 함께 봐야 할 이야기다. 공상과학 유산을 가지고 노는 법을 처음 공개한 지금, 다음 컬렉션에서 그 장난기가 더 과감해질지 혹은 다시 절제로 돌아갈지가 이 하우스를 계속 지켜볼 가장 직접적인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