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를 무기로 삼은 벨기에 신예의 승부수
LVMH 받은 줄리 케겔스, 중력을 컬렉션으로
9월 4일 파리, 배우 제니퍼 로렌스가 루이비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 시상식 무대에 올라 한 이름을 호명했다.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일곱 살 디자이너 줄리 케겔스였다. 그가 거머쥔 LVMH Prize는 현금 40만 유로, 업사이클링 플랫폼 노나소스의 패브릭 지원금 2만 유로, 그리고 LVMH 산하 최고 디자인 인력의 1년 멘토링까지 묶인, 신진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가장 무거운 상이다. 세계 각지의 수많은 신진 브랜드가 도전하는 이 상을 3년차 남짓한 브랜드가 거머쥐었다는 것부터가 이례적인데, 정확히 그 '무게'를 주제로 삼은 컬렉션이 수상 발표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파리 패션위크 무대에 올랐다는 사실이 이번 소식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상을 받고 곧바로 그 상이 안긴 압박을 옷으로 되받아친 셈이다. 졸업한 지 2년밖에 안 된 디자이너가 세계 최대 럭셔리 그룹의 이름을 등에 업고 곧장 다음 무대에 서는 일은 흔치 않다. 어제까지 업계 안쪽에서만 회자되던 이름이, 시상식 하나로 다음 시즌부터는 편집숍 바이어와 평단이 동시에 챙겨보는 이름으로 바뀌는 셈이고, 그 전환이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나는지를 이번 사례만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도 드물다.
무엇이 달라졌나
케겔스는 이번 SS27로 공식 스케줄에 오른 지 세 번째, LVMH Prize 수상 이후로는 처음으로 런웨이에 섰다. 컬렉션 이름은 '오늘의 사과(Apple of the Day)', 뉴턴이 사과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중력을 깨달았다는 일화를 그대로 가져온 제목이다. 그는 쇼노트에서 "지난 3월부터 하루하루가 꽉 찼다. 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기회,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은 책임이 따라왔다"고 적었고, "이 일을 시작하게 만든 기쁨을 지키면서 회사를 키우는 일이 일 중에서 가장 무겁고도 가장 사랑하는 부분이 됐다"고 덧붙였다. 후보 지명 발표 이후 쏟아진 관심과 책임의 무게를 옷으로 옮긴 발언이다. 실제 룩에서도 무거움과 가벼움은 한 몸으로 붙어 다녔다. 데님으로 만든 케이프와 가죽 시프트 드레스는 중력에 순순히 끌려 내려가는 실루엣을 취했고, 반대편에서는 오간자 가운이 안개처럼 몸 위로 떠올랐다. 시퀸 브라는 컵을 절반쯤 뜯어내 벌어진 채로 노출됐다. 그는 이 낙하의 이미지를 "예상에 못 미쳐 떨어지는 것, 압박 속에서 무너지는 것, 제자리를 찾아 떨어지는 것,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는 네 갈래로 풀어냈다. 수상 이전 세 시즌과 달리, 이번엔 관객 전체가 '이 사람이 상의 무게를 어떻게 소화했는가'를 확인하러 온 자리였다는 점에서 온도 자체가 달랐다.
왜 지금인가
LVMH Prize는 올해로 13회째를 맞았고, 이 상을 거쳐 간 이름들 — 마린 세르, 그레이스 웨일스 보너, 시몬 포르테 자크뮈스 — 은 이미 업계에서 검증된 성공 사례로 자리 잡았다. 수상 자체가 곧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파리 패션위크 공식 스케줄에서 시장과 평단이 한 디자이너를 동시에 주목하게 만드는 흔치 않은 장치라는 점은 분명하다. 케겔스가 안트베르펜 식스의 발터 반 베이렌동크, 디르크 반 세네 밑에서 사사한 계보를 잇는다는 사실도 이 시점에서 다시 주목받는다. 벨기에 패션이 실험적 실루엣과 개념적 접근으로 세계 무대를 흔들었던 그 계보가, 대형 그룹의 자본과 멘토링이 결합된 신세대 안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소식은 패션위크가 단순한 신상 공개 행사가 아니라, 누가 다음 세대의 취향을 대변할지 가려내는 선별 장치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형 그룹의 자본과 멘토링이 붙는 순간 창작자 개인의 기쁨과 브랜드 경영이라는 두 축이 어떻게 충돌하고 조율되는지, 케겔스가 쇼노트에 직접 적어 내려간 고백은 그 과정을 가장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다. 신인이 상을 받은 다음 시즌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가, 그 브랜드가 앞으로 독립적으로 클지 대기업 산하로 편입될지를 가늠하는 첫 신호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에 볼 것
앞으로 1년, 케겔스는 LVMH가 붙여준 멘토와 함께 회사의 체력을 키우는 작업에 들어간다. 2만 유로 규모의 노나소스 패브릭 지원은 남는 원단을 재활용해 다음 컬렉션을 만드는 데 쓰일 가능성이 크고, 이는 업사이클링을 표방한 지원 프로그램이 실제로 어떤 결과물로 이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번 SS27 룩들이 실제 리테일 라인업으로 어떻게 축소·변형되어 나오는지, 그리고 다음 시즌 쇼노트에서 케겔스가 '무게'라는 주제를 이어갈지 다른 화두로 넘어갈지를 지켜볼 만하다. 역대 수상자들이 그랬듯 수상 이듬해 컬렉션이 브랜드의 방향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SS27은 그 자체로 완결된 쇼가 아니라 케겔스라는 브랜드가 앞으로 어떤 정체성으로 굳어질지 가늠하는 첫 시험대로 읽는 편이 맞다. 압박을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는 이번 태도가 인터뷰나 다음 쇼노트에서도 반복되는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화두로 전환되는지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특히 업사이클링을 표방한 지원 프로그램이 실제 하이엔드 컬렉션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지는, 지속가능성을 앞세운 다른 브랜드들에게도 참고할 만한 선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무게와 가벼움을 동시에 쥐려던 이번 시도가 다음 시즌에도 이어진다면, 그건 우연한 콘셉트가 아니라 이 디자이너가 자신의 언어를 찾았다는 증거로 봐도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