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엘라가 라프 시몬스에게 바친 오마주
벨기에 두 거장이 같은 꽃으로 다시 만났다
9월 29일 오후 파리, 하루 사이에 열린 두 개의 대형 쇼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화두를 꺼내 들었다. 디올에서는 조나단 앤더슨이, 메종 마르지엘라에서는 글렌 마르텐스가 각각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두 사람 모두 쿠튀르 아틀리에의 오래된 이분법인 '플루(flou)'와 '타이외르(tailleur)'를 컬렉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패션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플루는 부드럽고 흘러내리는 듯한 실루엣을 다루는 재단 기법이고, 타이외르는 두꺼운 소재로 각을 세우는 정통 테일러링을 가리키는데, 두 하우스가 쇼노트에서 나란히 이 단어를 언급한 것 자체가 흔한 우연으로 넘기기엔 석연치 않은 지점이다. 그리고 마르지엘라 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라프 시몬스가 2012년 디올 쿠튀르 데뷔 무대에서 선보였던 상징적인 꽃 장식을 그대로 소환하며 패션계 세대교체의 계보를 무대 위에 다시 세웠다. 한 시즌, 한 도시, 같은 오후에 벌어진 이 겹침은 단순한 유행어의 일치가 아니라, 지금 파리 패션을 움직이는 얼굴들이 서로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특히 두 하우스 모두 지난해 새로 부임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이 쇼들은 단순한 신작 발표를 넘어 세대교체 이후 파리 패션이 어느 방향으로 취향을 재편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로 읽힌다.
무엇이 달라졌나
마르지엘라의 SS27 쇼 제목은 'HARD and SOFT', 앞서 말한 플루와 타이외르의 대비를 그대로 제목에 옮겨 놓은 것이다. 쇼가 열린 장소는 파리의 공연장 엘리제 몽마르트르였는데, 마르텐스는 이곳 내부를 시들어가는 꽃으로 뒤덮인 방들로 채웠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이는 라프 시몬스가 2012년 7월 디올 쿠튀르 데뷔 무대에서 천장부터 바닥까지 생화로 가득 채웠던 그 유명한 세트를 향한 오마주였고, 심지어 당시와 같은 플로리스트인 마크 콜레가 이번에도 작업을 맡았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시몬스의 2012년 무대가 생기 넘치는 절정의 꽃이었다면, 마르텐스가 재현한 꽃은 벽에 매달린 채 시들고 말라비틀어진 모습이었다. 마치 그날 이후 14년의 시간이 그 꽃들 위에 그대로 내려앉은 것처럼 연출된 셈이다. 이 시든 꽃의 이미지는 무대 장식에 그치지 않고 컬렉션의 프린트로 옮겨져, 활짝 핀 꽃이 옷 위에서 다시 한번 생명을 얻는 방식으로 마무리됐다. 쇼노트는 "이 세트 콘셉트는 복제와 패션을 향한 깊은 애정이라는 우리의 오랜 관심사를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실제 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반복하고 변형하는 방식 자체가 마르지엘라라는 하우스의 오랜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왜 지금인가
이 오마주가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타이밍과 인물 구도 때문이다. 글렌 마르텐스는 Y/프로젝트에서 11년을 보낸 뒤 2025년 메종 마르지엘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고, 동시에 디젤의 수장직도 겸하고 있는 지금 패션계에서 가장 바쁜 이름 중 하나다. 그런 그가 벨기에 출신 선배인 라프 시몬스를 정면으로 호출한 배경에는 단순한 존경 이상의 맥락이 있다. 시몬스의 2012년 디올 데뷔는 파리 쿠튀르의 정점에 선 사건으로, 지금까지도 디자이너 승계 역사에서 가장 자주 회자되는 장면으로 꼽힌다. 마르텐스 역시 벨기에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고, 이번 오마주는 그 계보를 잇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디올 무대에 선 조나단 앤더슨 역시 지난해 디올의 새 수장으로 임명된 인물로, 두 하우스 모두 세대교체 직후 첫 성수기 컬렉션을 치르는 시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올해 파리 패션위크 SS27은 9월 28일부터 10월 6일까지 101개 하우스가 참여하는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리고 있어, 새 얼굴들이 자신의 언어를 증명해야 하는 압박이 그 어느 시즌보다 크다. 이런 국면에서 나온 오마주이기에, 단순한 헌사를 넘어 내가 이 계보의 정당한 계승자라는 메시지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다음에 볼 것
이번 쇼가 남긴 질문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마르지엘라의 시든 꽃 프린트가 실제 컬렉션으로 얼마나, 어떤 형태로 이어질지다. 무대 장식이 곧바로 옷의 프린트로 연결된 만큼, 이 이미지가 다음 시즌 캠페인이나 룩북, 나아가 액세서리 라인까지 확장될지 지켜볼 지점이다. 다른 하나는 디올과 마르지엘라가 우연히 겹친 플루 대 타이외르라는 화두가 이번 시즌 파리 전체의 흐름으로 번질지 여부다. 두 하우스가 같은 시즌에 같은 개념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은,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들이 주도하는 이번 세대교체 물결이 특정한 미감의 공유로 수렴하고 있다는 신호로도 읽을 수 있다. 앞으로 이어질 다른 하우스들의 쇼에서 비슷한 대비 구도, 혹은 복제와 오마주라는 주제가 또 등장하는지 지켜볼 만하다. 무엇보다 마르텐스가 시몬스에게 보낸 이 헌사가 두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반응이나 후속 협업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패션 매체와 평단이 이 오마주를 승계의 상징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또 하나의 영리한 레퍼런스 놀이로 소비할지는 시즌 리뷰가 쏟아지는 향후 몇 주 사이에 드러날 전망이다.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들이 파리 최상위 하우스의 수장 자리를 잇달아 맡아온 흐름 속에서, 이번 오마주가 그 계보에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계기가 될지도 함께 지켜볼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