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모은 헬무트 랑 3500벌의 기록
헬무트 랑 전문 아카이브, 다큐멘터리로 세상에 나오다
베를린 쇤베르크의 낡은 아파트 한 채에 특정 디자이너 한 명만을 위한 완전한 연대기가 통째로 보관되어 있다면, 이는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 하나의 기록 보관소로 봐야 한다. 아테네 출신 수집가 마이클 카르다마키스가 2014년부터 모아온 이 공간에는 옷 6000점이 쌓여 있고, 그중 3500점이 1986년부터 2005년 시즌을 중심으로 한 헬무트 랑이다. 패션 아카이브는 원래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만 조용히 드나들며 참고 자료를 빌려 가는, 업계 안에서만 돌던 비밀스러운 창고였다. 외부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 벌 한 벌이 가격보다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내부가 25분짜리 다큐멘터리로 바깥에 공개되면서, 수집이라는 조용한 행위가 처음으로 영상의 주인공이 됐다. 한 사람이 10년 넘게 쌓아 올린 옷장이 어떻게 패션사를 증명하는 자료가 되는지, 그 과정이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는 점이 이번 공개의 핵심이다. 보통의 패션 아카이브가 여러 브랜드를 섞어 폭을 넓히는 방식을 택하는 것과 비교하면, 한 디자이너의 시즌을 끊김 없이 이어 붙인 사례는 흔치 않다. 이 희소성 자체가 지금 이 아카이브를 주목할 이유다.
무엇이 달라졌나
파리의 Passage(옛 이름 Le Souk)는 컨템포러리 레디투웨어와 오트쿠튀르를 포함해 4만여 점을 보유한 종합 아카이브다. 규모로만 보면 ENDYMA의 6000점은 그 7분의 1 수준에 그친다. 하지만 ENDYMA는 처음부터 넓이가 아니라 깊이를 택한 아카이브다. 전체 6000점 가운데 3500점을 헬무트 랑 한 브랜드에 집중시켜 1986년부터 2005년까지, 거의 20년에 이르는 시즌을 빠짐없이 연대기로 재구성했다. 버버리 프로섬 시절의 라프 시몬스, 릭 오웬스, 준야 와타나베처럼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유럽 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의 부 컬렉션도 함께 있지만, 아카이브의 중심축은 분명히 헬무트 랑 한 명이다. 카르다마키스는 2014년 노리치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며 빈티지 옷을 되파는 소소한 일로 수집을 시작했고, 졸업 후 런던에서 규모를 키운 뒤 한동안 고향 아테네로 돌아가 머물렀다. 2020년 베를린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지금의 쇤베르크 구역, 옛 건물 양식인 알트바우 아파트에 아카이브를 뿌리내렸다. 단순 보관을 넘어 의류 복원, 디자인 리서치와 컨설팅, 실제 판매까지 겸하는 구조로 운영된다는 점도 전시 위주의 종합 아카이브와 뚜렷하게 다른 지점이다.
왜 지금인가
패션 아카이브는 런던의 컨템포러리 워드로브, 파리의 Passage처럼 각 도시마다 존재하지만 대개 업계 안에서만 조용히 돌아가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가 비공개로 드나들며 참고 자료를 빌려 가는 구조라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미니멀리즘, 특히 헬무트 랑이 보여준 절제된 실루엣과 기능적 디테일이 현대 컬렉션에서 거듭 재해석되면서, 그 원본을 쥐고 있는 아카이브의 희소성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중고·빈티지 시장이 커지고 디자인 리서치용 참고 자료의 수요가 늘어난 흐름과도 맞물린다. 희귀한 90년대 헬무트 랑 한 점이 경매와 리셀 플랫폼에서 꾸준히 값이 오르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카르다마키스의 수집도 처음부터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2018년에 한 매체가 그의 작업 경로를 길게 인터뷰한 뒤로 꾸준히 입소문이 났고, 이번에는 아카이브가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자기 서사로 이야기를 전환했다는 점이 이전과 다르다. 베를린이 파리와 런던 중심이던 패션 지형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넓혀가는 시점에 이 아카이브가 자리를 잡았다는 점도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다음에 볼 것
이번 다큐멘터리는 베를린 기반 감독 필립 그난트가 25분 분량으로 연출했고, 베니 줄리안 게이가 사진을 맡았다. 그난트는 빈티지 의류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오랫동안 구상하며 디자이너와 역사를 조사하다가 그 과정에서 ENDYMA를 발견했는데, 이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아카이브의 가치를 재발견한 사례이기도 하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다큐멘터리를 직접 찾아보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영상에는 쇤베르크의 알트바우 아파트 내부, 수천 점의 옷이 분류되고 보존되는 방식, 카르다마키스가 설명하는 각 시즌의 맥락이 담겨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눈여겨볼 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ENDYMA가 복원과 디자인 컨설팅, 판매까지 겸하는 구조를 통해 패션 업계와 얼마나 더 밀착하게 될지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자기 서사형 다큐멘터리가 다른 도시의 전문 아카이브로도 번질지 여부다. 특정 디자이너 한 명에 집중한 좁고 깊은 컬렉션이 콘텐츠로서도 통한다는 사례가 만들어진 셈이라, 비슷한 전문 아카이브들도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 사람의 옷장이 기록이자 콘텐츠가 되는 흐름을 이 아카이브가 먼저 보여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