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2 · FRI SEOUL VOL.02 / NO.10
Search Letter
delay″
Unbound Visions, Inspired Living.
Beauty Health Technology Gastronomy Culture Dispatches
2026.10.22
SearchLetter
delay″
Beauty Health Technology Gastronomy Culture Dispatches
← Culture 2026.10.12 6 min read Irang 글 · 편집부
Index
Culture · Close Look

패션 디렉터가 고른 뉴욕 마티니 다섯 곳

한 사람의 취향이 도시의 술집 지도가 될 때

뉴욕에서 마티니 한 잔을 고른다는 것은 단순히 술을 주문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이 도시를 어떤 순서로 읽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패션 매거진 RUSSH가 최근 공개한 뉴욕 마티니 가이드는, 패션 브랜드 Harris Tapper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로렌 태퍼가 자신의 동선을 따라 고른 술집들을 모아 놓은 지도다. 라이프스타일·패션·여행을 함께 다루는 매체가 레스토랑 평론가 대신 패션계 인물에게 '마티니 지도'를 맡겼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음료를 둘러싼 대화가 더 이상 바텐더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신호로 읽힌다. 옷을 고르는 안목으로 도시를 고른다는 발상은, 패션이 식음료의 영역까지 자연스럽게 번져 나가는 요즘 매체 지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호의 발타자르(Balthazar), 트라이베카의 프렌체트(Frenchette)와 오데온(Odeon), 그리고 칼라일 호텔의 베멀만스 바(Bemelmans Bar)까지, 네 곳 모두 뉴욕에서 수십 년째 자리를 지켜온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진이든 보드카든, 드라이든 더티든, 마티니는 재료의 조합이 아니라 그 잔을 받아 든 공간이 완성하는 음료라는 사실을, 이 목록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무엇이 달라졌나

이 가이드가 흥미로운 지점은 추천 장소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와 성격을 대표한다는 데 있다. 베멀만스 바는 칼라일 호텔 안에 자리해, 동화 작가 루드비히 베멀만스가 직접 그린 벽화와 금박으로 장식된 천장 아래에서 마티니를 낸다. 오래된 그림이 벽을 채운 공간에서 마시는 한 잔은, 뉴욕의 올드 머니 문화가 지금도 마티니라는 음료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대편에는 템플 바(Temple Bar)가 있다. 이곳은 프로즌, 더티, 솔트 앤 페퍼 등 여덟 가지 변형으로 구성된 마티니 전용 메뉴를 운영한다. 하나의 클래식을 여덟 갈래로 쪼개 메뉴판에 올린다는 것은, 마티니가 '정답이 하나인 레시피'에서 '취향에 맞춰 골라 먹는 품목'으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소호의 발타자르와 트라이베카의 프렌체트·오데온은 그 사이를 채운다. 세 곳 모두 프렌치 비스트로의 격식을 갖추면서도 동네 바 특유의 친밀함을 동시에 지닌 공간으로, 격식과 일상이 한 테이블 위에서 만난다. 결국 이 다섯 곳을 한 줄로 세우면, 전통적 의례와 실험적 변주, 격식과 일상이 같은 도시, 같은 음료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지형이 드러난다. 이 지형이 눈여겨볼 만한 이유는, 한 도시의 바 문화가 하나의 유행으로 수렴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결을 동시에 품은 채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 지금인가

칵테일 신에서 마티니가 다시 호출되는 흐름은 낯설지 않다. 지난 몇 년간 '클래식으로의 회귀'는 미니멀한 하이볼과 내추럴 와인 중심의 바 문화에 대한 반작용처럼 소비돼 왔고, 마티니는 그 회귀를 대표하는 음료로 자주 꼽혀 왔다. 이번 가이드가 주목되는 이유는 이 흐름을 전하는 주체가 음식·술 전문지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패션·여행을 다루는 매거진이라는 점이다. 패션지가 레스토랑 평론가 대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입을 빌려 술집 목록을 짠다는 것은, 마티니가 옷차림이나 여행지를 고르는 것과 같은 선상의 취향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패션계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는 형식 자체는 최근 라이프스타일 매체에서 흔히 쓰이는 구성이지만, 이번 목록은 신생 핫플레이스를 나열하는 대신 수십 년 역사를 가진 공간들을 전면에 세웠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유행을 좇기보다 이미 검증된 장소의 가치를 다시 조명하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이런 선택은 실패 확률이 낮다는 신뢰로 읽힌다. 새로 생긴 바를 탐색하는 대신, 이미 수많은 뉴요커가 검증한 공간을 안내받는 셈이기 때문이다. 가을로 접어들며 실내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계절적 흐름 역시, 어둡고 격식 있는 바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높아지는 배경으로 겹쳐 읽을 수 있다.

다음에 볼 것

지금 이 가이드를 참고할 독자라면, 다섯 곳의 위치부터 머릿속에 그려두는 편이 유용하다. 소호의 발타자르, 트라이베카의 프렌체트와 오데온은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모여 있어 한 저녁에 두세 곳을 이어 들르는 동선도 가능하다. 반면 칼라일 호텔의 베멀만스 바는 어퍼이스트사이드에 따로 자리해, 저녁 일정을 분리해서 잡는 편이 낫다. 템플 바의 여덟 가지 변형 메뉴는 한 번에 비교해 마셔보기 좋은 구성이라, 진과 보드카, 드라이와 더티 사이에서 자신의 취향을 가늠해보는 입문 코스로 삼을 만하다. 뉴욕 여행을 계획 중인 독자라면 이 다섯 곳을 하나의 체크리스트로 삼아 일정에 끼워 넣어도 좋을 정도로 구체적인 목록이다. 더 크게 보면, 특정 업계 인물의 사적인 동선을 빌려 도시의 술집 지형을 그리는 콘텐츠 형식이 이후에도 이어질지가 관전 포인트다. 패션지가 레스토랑·바 가이드를 자체 콘텐츠로 끌어들이는 흐름이 이어진다면, 뉴욕 외의 다른 도시를 다룬 마티니 지도나, 다른 업계 인물이 그리는 또 다른 버전의 리스트가 뒤따를 가능성도 있다. 결국 이 가이드가 보여주는 것은 한 잔의 술이 아니라, 취향을 가진 한 사람의 시선이 도시를 어떻게 편집하는지에 대한 사례다. 다음에 비슷한 목록이 나온다면, 그 목록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가 장소 못지않게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NYCLauren TapperRUSSH Gin
delayseconds · 2026.10.12
Read next
Culture
70대 부부가 바꾸는 인플루언서의 나이 공식
Culture
H&M이 다시 쓴 옷의 기준, 소재와 사람을 묶다
Culture
깃털 대신 공기, 노스페이스가 꺼낸 60주년 실험복
d″
이 기사가 좋았다면, 월 1회 레터로 받아보세요.
Subscribe
← Culture

패션 디렉터가 고른 뉴욕 마티니 다섯 곳

한 사람의 취향이 도시의 술집 지도가 될 때

2026.10.12 · 6 min · Irang

뉴욕에서 마티니 한 잔을 고른다는 것은 단순히 술을 주문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이 도시를 어떤 순서로 읽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패션 매거진 RUSSH가 최근 공개한 뉴욕 마티니 가이드는, 패션 브랜드 Harris Tapper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로렌 태퍼가 자신의 동선을 따라 고른 술집들을 모아 놓은 지도다. 라이프스타일·패션·여행을 함께 다루는 매체가 레스토랑 평론가 대신 패션계 인물에게 '마티니 지도'를 맡겼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음료를 둘러싼 대화가 더 이상 바텐더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신호로 읽힌다. 옷을 고르는 안목으로 도시를 고른다는 발상은, 패션이 식음료의 영역까지 자연스럽게 번져 나가는 요즘 매체 지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호의 발타자르(Balthazar), 트라이베카의 프렌체트(Frenchette)와 오데온(Odeon), 그리고 칼라일 호텔의 베멀만스 바(Bemelmans Bar)까지, 네 곳 모두 뉴욕에서 수십 년째 자리를 지켜온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진이든 보드카든, 드라이든 더티든, 마티니는 재료의 조합이 아니라 그 잔을 받아 든 공간이 완성하는 음료라는 사실을, 이 목록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무엇이 달라졌나

이 가이드가 흥미로운 지점은 추천 장소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와 성격을 대표한다는 데 있다. 베멀만스 바는 칼라일 호텔 안에 자리해, 동화 작가 루드비히 베멀만스가 직접 그린 벽화와 금박으로 장식된 천장 아래에서 마티니를 낸다. 오래된 그림이 벽을 채운 공간에서 마시는 한 잔은, 뉴욕의 올드 머니 문화가 지금도 마티니라는 음료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대편에는 템플 바(Temple Bar)가 있다. 이곳은 프로즌, 더티, 솔트 앤 페퍼 등 여덟 가지 변형으로 구성된 마티니 전용 메뉴를 운영한다. 하나의 클래식을 여덟 갈래로 쪼개 메뉴판에 올린다는 것은, 마티니가 '정답이 하나인 레시피'에서 '취향에 맞춰 골라 먹는 품목'으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소호의 발타자르와 트라이베카의 프렌체트·오데온은 그 사이를 채운다. 세 곳 모두 프렌치 비스트로의 격식을 갖추면서도 동네 바 특유의 친밀함을 동시에 지닌 공간으로, 격식과 일상이 한 테이블 위에서 만난다. 결국 이 다섯 곳을 한 줄로 세우면, 전통적 의례와 실험적 변주, 격식과 일상이 같은 도시, 같은 음료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지형이 드러난다. 이 지형이 눈여겨볼 만한 이유는, 한 도시의 바 문화가 하나의 유행으로 수렴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결을 동시에 품은 채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 지금인가

칵테일 신에서 마티니가 다시 호출되는 흐름은 낯설지 않다. 지난 몇 년간 '클래식으로의 회귀'는 미니멀한 하이볼과 내추럴 와인 중심의 바 문화에 대한 반작용처럼 소비돼 왔고, 마티니는 그 회귀를 대표하는 음료로 자주 꼽혀 왔다. 이번 가이드가 주목되는 이유는 이 흐름을 전하는 주체가 음식·술 전문지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패션·여행을 다루는 매거진이라는 점이다. 패션지가 레스토랑 평론가 대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입을 빌려 술집 목록을 짠다는 것은, 마티니가 옷차림이나 여행지를 고르는 것과 같은 선상의 취향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패션계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는 형식 자체는 최근 라이프스타일 매체에서 흔히 쓰이는 구성이지만, 이번 목록은 신생 핫플레이스를 나열하는 대신 수십 년 역사를 가진 공간들을 전면에 세웠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유행을 좇기보다 이미 검증된 장소의 가치를 다시 조명하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이런 선택은 실패 확률이 낮다는 신뢰로 읽힌다. 새로 생긴 바를 탐색하는 대신, 이미 수많은 뉴요커가 검증한 공간을 안내받는 셈이기 때문이다. 가을로 접어들며 실내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계절적 흐름 역시, 어둡고 격식 있는 바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높아지는 배경으로 겹쳐 읽을 수 있다.

다음에 볼 것

지금 이 가이드를 참고할 독자라면, 다섯 곳의 위치부터 머릿속에 그려두는 편이 유용하다. 소호의 발타자르, 트라이베카의 프렌체트와 오데온은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모여 있어 한 저녁에 두세 곳을 이어 들르는 동선도 가능하다. 반면 칼라일 호텔의 베멀만스 바는 어퍼이스트사이드에 따로 자리해, 저녁 일정을 분리해서 잡는 편이 낫다. 템플 바의 여덟 가지 변형 메뉴는 한 번에 비교해 마셔보기 좋은 구성이라, 진과 보드카, 드라이와 더티 사이에서 자신의 취향을 가늠해보는 입문 코스로 삼을 만하다. 뉴욕 여행을 계획 중인 독자라면 이 다섯 곳을 하나의 체크리스트로 삼아 일정에 끼워 넣어도 좋을 정도로 구체적인 목록이다. 더 크게 보면, 특정 업계 인물의 사적인 동선을 빌려 도시의 술집 지형을 그리는 콘텐츠 형식이 이후에도 이어질지가 관전 포인트다. 패션지가 레스토랑·바 가이드를 자체 콘텐츠로 끌어들이는 흐름이 이어진다면, 뉴욕 외의 다른 도시를 다룬 마티니 지도나, 다른 업계 인물이 그리는 또 다른 버전의 리스트가 뒤따를 가능성도 있다. 결국 이 가이드가 보여주는 것은 한 잔의 술이 아니라, 취향을 가진 한 사람의 시선이 도시를 어떻게 편집하는지에 대한 사례다. 다음에 비슷한 목록이 나온다면, 그 목록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가 장소 못지않게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NYCLauren TapperRUSSH Gin
delayseconds · 2026.10.12
Read next
Culture
70대 부부가 바꾸는 인플루언서의 나이 공식
Culture
H&M이 다시 쓴 옷의 기준, 소재와 사람을 묶다
Culture
깃털 대신 공기, 노스페이스가 꺼낸 60주년 실험복
delayseconds
Unbound Visions, Inspired Living..
얽매이지 않는 시선, 영감을 주는 삶
Beauty Health Technology
Gastronomy Culture Dispatches
LetterSearchFAQRSS
© 2026 delayseconds The mark uses the double prime ″ (U+2033)

바로가기 등록하시면, 더 쉽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