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M이 다시 쓴 옷의 기준, 소재와 사람을 묶다
환경과 인권을 한 틀로 합친 패스트패션의 신호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옷을 만드는 패스트패션 기업 H&M Group이 2026년 9월, 소재조달 기준(Material Sourcing Requirements)을 v1-2026으로 다시 썼다. 이번 개정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기후·자연·인권·동물복지를 하나의 기준표 안에 묶어낸 방식이다. 지금까지 환경 정책과 인권 정책은 각자 다른 문서, 다른 담당 조직, 다른 평가 주기로 움직였다. 옷 한 벌이 누구의 손을 거쳐 왔는지와, 그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구에 남긴 흔적이 서로 다른 잣대로 평가됐다는 뜻이다. H&M이 이 둘을 한 테이블로 합친 시점이 지금인 이유는 단순하다. 2025년 한 해 동안 재활용·지속가능 조달 자재 비율이 91%까지 올라갔고, 완전 재활용 자재만 따로 떼어도 32%에 달했다는 성과가 먼저 쌓였기 때문이다. 수치가 쌓이자, 그 수치를 관리하는 틀 자체를 다시 짤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셈이다. 패션을 소재와 디자인의 문제로만 보던 소비자에게, 이 변화는 "내가 입는 옷이 어떤 기준으로 걸러진 결과물인가"를 다시 묻게 만든다. 거대 공급망을 움직이는 브랜드가 기준 문서 하나를 고쳐 쓰는 일은, 매장에 걸린 옷의 디자인보다 훨씬 느리게 보이지만 훨씬 넓게 퍼지는 변화다.
무엇이 달라졌나
이번 개정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달라진 지점은 "기본(fundamental)"과 "지향(aspirational)"이라는 두 단계로 나뉜 평가 체계다. H&M과 거래하는 모든 Business Partner는 이제 자기 사업장뿐 아니라 자신의 하위 공급망까지 UN과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에 맞춰 성과를 입증해야 한다. 이 입증은 한 번의 서류 제출로 끝나지 않는다. Sustainability Impact Partnership Programme(SIPP)이라는 이름의 틀 안에서 주기적으로 재평가가 이뤄진다. 숫자로 보면 변화의 폭이 분명해진다. Tier 1 공급망, 즉 H&M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1차 협력사 근로자의 100%가 불만을 제기하고 해결받을 수 있는 메커니즘에 접근할 수 있게 됐고,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92.6%는 유해화학물질 ZDHC(Zero Discharge of Hazardous Chemicals) 기준을 충족한다. 탄소 배출 쪽에서는 H&M이 직접 통제하는 범위(Scope 1·2)에서 41%, 공급망 전체를 포함하는 범위(Scope 3)에서 34.6%를 줄였다. Scope 3는 원단을 짜고 염색하고 운송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수치라 줄이기가 훨씬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34.6%라는 감축폭은 공급망 설계 자체를 손댔다는 신호로 읽힌다. 2026년까지 공급망 내 화석연료를 단계적으로 없애겠다는 목표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왜 지금인가
"왜 지금인가"를 설명하려면 H&M이 내건 숫자 하나를 먼저 봐야 한다. 2030년까지 재활용 또는 지속가능 조달 자재 비율을 10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다. 2025년 기준 91%까지 와 있다는 건, 남은 4년 안에 나머지 9%를 채워야 한다는 뜻이고, 그 마지막 구간이 가장 어렵다는 걸 업계는 이미 알고 있다. 쉬운 전환은 이미 끝났고, 지금부터는 공급망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하는 구간에 들어선 셈이다. 그래서 환경 정책과 인권 정책을 한 틀로 묶는 선택이 이 시점에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패스트패션 업계는 오랫동안 "친환경 소재를 쓴다"는 선언과 "노동자 처우를 개선한다"는 선언을 각각 따로 홍보해 왔고, 소비자는 그 둘이 실제로 연결돼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재활용 섬유를 늘리는 일과 그 섬유를 만드는 공장 노동자의 불만 처리 접근권을 같은 평가표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소재의 지속가능성과 사람의 지속가능성을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는 인식이 산업 안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대형 브랜드의 기준이 바뀌면 그 기준을 따라야 하는 하위 협력사 전체의 운영 방식도 함께 바뀐다. H&M처럼 공급망의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정책 하나의 개정이 실제로는 수백 개 공장의 작업 방식을 재조정하는 일로 이어진다.
다음에 볼 것
앞으로 지켜볼 지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2030년 100% 목표를 향한 남은 9%포인트가 어떤 속도로 줄어드는지다. 완전 재활용 자재 비율이 32%에 그친다는 사실은, '지속가능 조달'로 분류되는 자재 중 상당수가 아직 완전한 재활용 단계에는 못 미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간극이 좁혀지는 속도가 목표 달성의 진짜 가늠자가 될 것이다. 둘째는 Sustainability Impact Partnership Programme을 통한 주기적 재평가가 실제로 거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협력사가 거래에서 배제되는 사례가 나오는지, 아니면 유예 기간을 주며 개선을 돕는 방식으로 운영되는지에 따라 이 정책의 무게가 달라진다. 셋째는 2026년까지로 잡은 공급망 화석연료 단계적 폐지 목표의 진행 상황이다. 에너지 전환은 재활용 소재 확대보다 설비 투자 부담이 커서, 목표 시점이 다가올수록 협력사들의 실제 이행률이 공개될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인권·환경 옹호자 보호 조항이 새로 포함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공급망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개인을 보호하는 장치를 명문화했다는 의미로, 향후 유사한 조항이 다른 대형 브랜드의 정책에도 번져 나가는지를 살펴볼 만한 선례가 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지표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 옷값에 포함되지 않던 비용들이, 이제 기준표 위에서 얼마나 투명하게 드러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