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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ulture 2026.09.17 5 min read Irang 글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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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와 제국 사이, 루아르가 입힌 두 개의 역사

뉴욕 퀴어의 거리와 식민의 이름을 나란히 세우다

뉴욕패션위크 무대에 흡혈귀 같은 실루엣이 등장했다. 도미니카계 디자이너 라울 로페즈(Raul Lopez)가 이끄는 브랜드 루아르(Luar)가 2027년 봄여름(SS27) 컬렉션에 붙인 이름은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콜럼버스"다. 얼핏 지명 하나를 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역사를 한 문장 안에 욱여넣은 제목이다. 하나는 로페즈가 청년기를 보낸 뉴욕의 퀴어 문화 중심지 크리스토퍼 스트리트이고, 다른 하나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비롯한 카리브해 식민 역사의 출발점으로 지목되는 인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그는 쇼 노트에서 이 컬렉션이 "거리와 제국, 몸소 살아낸 것과 강요된 것 사이의 긴장" 위에 놓여 있다고 직접 밝혔다. 두 이름이 우연히 겹친 게 아니라, 자신이 물려받은 상반된 두 유산을 정면으로 마주 세운 결과라는 뜻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로페즈가 쇼를 준비하며 공개한 무드보드에는 콜럼버스의 초상화 옆에 전혀 다른 사진 한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뉴욕 플랫아이언 지역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한 노신사의 사진이었다. 정작 그 노신사 본인은 자신이 패션 영감의 원천이 됐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로페즈는 이 우연한 발견의 순간을 "이거다 싶었다"고 표현하며 "뭔가를 찾아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실제 런웨이에는 이 이질적인 조합이 그대로 옷으로 옮겨졌다. 낡은 가죽 바이커 재킷과 펑크적 요소가 15~16세기 실루엣, 화려한 레이스 러플 소매, 정교한 테일러링, 블루머 팬츠, 역사적인 깃털 모자와 한 무대 위에서 충돌했다. 여기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가 물성으로 스며든 지점이 두드러진다. 카카오 빈을 실크에 프린트한 소재와 "썩은 카카오"라 이름 붙인 코트가 그것인데, 이는 카카오 빈이 한때 도미니카에서 실제 화폐로 쓰였다는 자료 조사에서 끌어온 디테일이다. 거리의 언어와 제국의 상징, 역사 속 통화가 옷 한 벌 안에서 동시에 발화하는 방식이다.

왜 지금인가

최근 몇 시즌 패션위크에서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뿌리를 정체성 서사로 소비하는 방식은 흔해졌지만, 로페즈의 접근은 그 서사를 낭만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그는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미화하거나 단순히 비판하는 대신, 도미니카인들이 "직접 쓰지 않은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규정하며 그 불편함을 그대로 무대에 올렸다. 동시에 자신이 실제로 성장한 장소인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즉 뉴욕 퀴어 커뮤니티의 역사적 거점을 같은 무게로 병치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식민의 기억과 퀴어 커뮤니티의 기억을 나란히 놓는 방식은, 패션이 흔히 소비하는 "출신 배경 마케팅"과는 다른 층위의 질문을 던진다. 누구의 이름으로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억을 감당하는 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뉴욕패션위크라는 무대 자체가 이미 다양한 이민자 출신 디자이너들의 정체성 서사가 각축하는 장이 된 지 오래인데, 루아르는 그 안에서도 두 개의 상반된 유산을 화해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옷 위에 병치했다는 점에서 이번 시즌 유독 도드라진다.

다음에 볼 것

이번 컬렉션은 이미지 22장 규모의 갤러리로 공개됐고, 정식 판매나 가격 공개 시점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로페즈가 이번 시즌에서 보여준 태도, 즉 정체성을 하나의 깔끔한 메시지로 정리하지 않고 모순인 채로 내버려 두는 방식은 루아르라는 브랜드가 다음 시즌에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카카오 빈이라는 도미니카 고유의 물성을 실크 프린트와 "썩은 카카오" 코트라는 구체적 오브제로 변환한 방식은, 앞으로 이 브랜드가 원자재나 지역 서사를 다루는 태도를 가늠할 실마리가 된다. 역사적 실루엣과 펑크 요소를 뒤섞은 스타일링 문법 역시 다음 시즌 후속작에서 어떻게 진화할지 지켜볼 지점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플랫아이언에서 우연히 마주친 무명의 노신사처럼, 로페즈가 영감을 길어 올리는 방식 자체가 계획된 리서치보다 거리에서의 우연한 마주침에 가깝다는 점이다. 다음 컬렉션에서도 이런 즉흥적 관찰이 다시 서사의 출발점이 될지, 아니면 이번처럼 역사적 인물과 병치되는 더 큰 구조로 발전할지가 관전 포인트다.

VampiresLuarGalleryChristopher Street ColumbusRaul LopezChristopher Colum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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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와 제국 사이, 루아르가 입힌 두 개의 역사

뉴욕 퀴어의 거리와 식민의 이름을 나란히 세우다

2026.09.17 · 5 min · Irang

뉴욕패션위크 무대에 흡혈귀 같은 실루엣이 등장했다. 도미니카계 디자이너 라울 로페즈(Raul Lopez)가 이끄는 브랜드 루아르(Luar)가 2027년 봄여름(SS27) 컬렉션에 붙인 이름은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콜럼버스"다. 얼핏 지명 하나를 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역사를 한 문장 안에 욱여넣은 제목이다. 하나는 로페즈가 청년기를 보낸 뉴욕의 퀴어 문화 중심지 크리스토퍼 스트리트이고, 다른 하나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비롯한 카리브해 식민 역사의 출발점으로 지목되는 인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그는 쇼 노트에서 이 컬렉션이 "거리와 제국, 몸소 살아낸 것과 강요된 것 사이의 긴장" 위에 놓여 있다고 직접 밝혔다. 두 이름이 우연히 겹친 게 아니라, 자신이 물려받은 상반된 두 유산을 정면으로 마주 세운 결과라는 뜻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로페즈가 쇼를 준비하며 공개한 무드보드에는 콜럼버스의 초상화 옆에 전혀 다른 사진 한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뉴욕 플랫아이언 지역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한 노신사의 사진이었다. 정작 그 노신사 본인은 자신이 패션 영감의 원천이 됐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로페즈는 이 우연한 발견의 순간을 "이거다 싶었다"고 표현하며 "뭔가를 찾아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실제 런웨이에는 이 이질적인 조합이 그대로 옷으로 옮겨졌다. 낡은 가죽 바이커 재킷과 펑크적 요소가 15~16세기 실루엣, 화려한 레이스 러플 소매, 정교한 테일러링, 블루머 팬츠, 역사적인 깃털 모자와 한 무대 위에서 충돌했다. 여기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가 물성으로 스며든 지점이 두드러진다. 카카오 빈을 실크에 프린트한 소재와 "썩은 카카오"라 이름 붙인 코트가 그것인데, 이는 카카오 빈이 한때 도미니카에서 실제 화폐로 쓰였다는 자료 조사에서 끌어온 디테일이다. 거리의 언어와 제국의 상징, 역사 속 통화가 옷 한 벌 안에서 동시에 발화하는 방식이다.

왜 지금인가

최근 몇 시즌 패션위크에서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뿌리를 정체성 서사로 소비하는 방식은 흔해졌지만, 로페즈의 접근은 그 서사를 낭만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그는 콜럼버스라는 이름을 미화하거나 단순히 비판하는 대신, 도미니카인들이 "직접 쓰지 않은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규정하며 그 불편함을 그대로 무대에 올렸다. 동시에 자신이 실제로 성장한 장소인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즉 뉴욕 퀴어 커뮤니티의 역사적 거점을 같은 무게로 병치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식민의 기억과 퀴어 커뮤니티의 기억을 나란히 놓는 방식은, 패션이 흔히 소비하는 "출신 배경 마케팅"과는 다른 층위의 질문을 던진다. 누구의 이름으로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억을 감당하는 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뉴욕패션위크라는 무대 자체가 이미 다양한 이민자 출신 디자이너들의 정체성 서사가 각축하는 장이 된 지 오래인데, 루아르는 그 안에서도 두 개의 상반된 유산을 화해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옷 위에 병치했다는 점에서 이번 시즌 유독 도드라진다.

다음에 볼 것

이번 컬렉션은 이미지 22장 규모의 갤러리로 공개됐고, 정식 판매나 가격 공개 시점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로페즈가 이번 시즌에서 보여준 태도, 즉 정체성을 하나의 깔끔한 메시지로 정리하지 않고 모순인 채로 내버려 두는 방식은 루아르라는 브랜드가 다음 시즌에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카카오 빈이라는 도미니카 고유의 물성을 실크 프린트와 "썩은 카카오" 코트라는 구체적 오브제로 변환한 방식은, 앞으로 이 브랜드가 원자재나 지역 서사를 다루는 태도를 가늠할 실마리가 된다. 역사적 실루엣과 펑크 요소를 뒤섞은 스타일링 문법 역시 다음 시즌 후속작에서 어떻게 진화할지 지켜볼 지점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플랫아이언에서 우연히 마주친 무명의 노신사처럼, 로페즈가 영감을 길어 올리는 방식 자체가 계획된 리서치보다 거리에서의 우연한 마주침에 가깝다는 점이다. 다음 컬렉션에서도 이런 즉흥적 관찰이 다시 서사의 출발점이 될지, 아니면 이번처럼 역사적 인물과 병치되는 더 큰 구조로 발전할지가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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